호도스의 서재

3.1운동과 천황제(삼일운동100주년기념기독교학술제 발제글)

작성자
hodos
작성일
2019-04-09 12:08

삼일운동100주년기념기독교학술제
철원군기독교연합회


3.1운동과 천황제


김산덕
(일본그리스도교회, 호도스신학원)
201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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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세우고, 100년 전에 일어난 3.1운동을 기억하고 현재를 성찰하여, 앞으로의 미래 100년을 준비하고자 노력하여 왔다. 또한 많은 단체들과 모임들도 3.1독립운동백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여 왔다. 3.1운동은 분명 여러 분야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그것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와 깊은 뜻이 풍성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3.1운동의 성격을 일본의 ‘천황제’라는 종교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재조명하여 보고, 그것을 오늘날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적용시켜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시사를 던져 줄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2019년은 위안부 할머니, 강제 징용에 대한 사죄가 없는 가운데, 일본에서 새로운 일본 왕이 즉위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역사적 정황은 3.1운동이 결코 천황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침략전쟁은 물론이거니와, 천황제와 강제 징용 등을 정당화시킨 사상적 근원이 ‘천황제’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3.1절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3.1운동이 민족독립운동이라는 틀을 뛰어넘은, 일본 제국주의의 원천이며, 모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던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였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환언하면, 3.1운동은 정치적 독립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상의 자유, 양심과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는 인류 사회의 기본적이며 보편적 가치를 확보하려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3.1운동이 그 당시 인도의 반영 독립운동과 중국의 5.4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사실이 전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실로 3.1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독립을 뛰어넘어서, 억압과 수탈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정치 종교이데올로기였던 천황제를 기축으로 하는 일본이라는 종교적 광기 집단에 대한 거부였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종교, 믿음, 양심, 사상을 확보하려는 인류적 운동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은 국가 유지를 위해서 천황제 종교이데올로기를 견지하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3.1 독립운동이 침략 전쟁의 원흉이었던 천황제 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이자 거부였다면, 그것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의는 지금도 파시즘적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있는 일본 내의 소수자에게 우리 민족의 3.1운동 정신을 전달하여, 그 역사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것에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은 일본 : 2019년, 다이죠우사이(大嘗祭)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금년 2019년에는, 100년전 한반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하고 유린하였던 메이지(쇼와) 정부가 일본국민들에게 침략 전쟁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내세웠던 그 천황제가 일본 정부에 의해서 공식 행사로 버젓이 집행되는 해이기도 하다. 즉, ‘다이죠우사이’가 집행된다는 것이다.
‘다이죠우사이’는 천황을 현인신(現人神, 아라히토가미)으로, 즉 ‘신’으로 신격화하는 의식이다. 메이지정부는 근대제국주의 국가의 틀을 형성하면서, 서방의 기독교에 맞먹는 천황교(국가교)를 만들어, 국민을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묶어버렸고, 단일 국가 단일 종교로서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천황교라는 종교이데올로기를 구축하여 제정일치의 신정 국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천황이 즉위할 때는 센소(践祚), 즉위식(即位礼), 다이죠우사이(大嘗祭)라고 하는 세 가지 예식을 치르는데, 그 가운데 “다이죠우사이”는 천황을 현인신으로 신격화하는 예식이다. 메이지 천황 이후 모든 천황들은 다이죠우사이를 통하여 현인신이 되었다(明治1871, 大正1915, 昭和1928, 平成1990). 그런데 2019년 현 천황 아키히토가 물러나고 그 아들 나루히토가 새 천황이 되면서, 19년 5월1일에 즉위식, 10월22일 즉위 공포식, 그리고 11월14-15일에는 다이죠우사이를 예정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메이지 정부가 일본제국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었던 천황제 종교이데올로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3.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은, 100년 전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인간의 기본권을 착취하며, 유린했던 천황교 종교이데올로기가 지금도 일본인들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빼앗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재조명될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천황제의 시작

천황을 예배하는 신흥종교 ‘일본 국가교’(천황교)의 탄생

일본에서 천황제가 국가통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대두되는 것은 메이지 초기(1868-1890)였다. 그들은 왕정복고에 의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구축하여, 일본을 근대화로 이끌며 제국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때 일본은 제국의 정신적 지주를 황실신토에 두고, 그 중심에 ‘천황’을 앉혀 제정일치의 신정국가를 세웠다. 그들은 ‘키키신화’(記紀神話 [古事記, 또는日本書紀]) 등 일본 고래의 다양한 문헌과 법령을 이용하여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대일본국제국헌법”(1889)을 제정하였는데,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더욱이 제3조는 천황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힌다.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다시 말해서 천황의 신성을 헌법으로 규정하여, “제정일치”(theocracy)의 신정정치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세웠다는 말이다. 더욱이 천황과 그의 통치에 신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메이지 정권은 천황과 황실에 관한 “황실제사령”이라는 법률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황실 신토를 국가 종교로 규정하였다.
현인신으로서 천황이 다스리는 신정 국가 일본은, “교육칙령”(1890.10)을 발표하여 천황 종교이데올로기를 통한 종교적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국민들을 세뇌시켰는데, 이때 부국강병의 강력한 ‘대일본제국’을 건설하는 과업은 천황의 뜻이며, 그 천황을 섬기는 것을 제일근본으로 삼았다.

상징 천황제 : 일본 국가교(国家教)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서 메이지 정부에 의해서 제정되었던 “대일본국제국헌법”은 폐지되고, 쇼와 정부에 의해서 “일본국헌법”(1946)이 발표된다. 그것의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 이른바 ‘상징적 천황제’가 패전 후 전면에 등장하면서 국민주권, 기본적인 인권, 평화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제정일치가 아닌 정교분리의 원칙에 입각한 나라 세우기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새 헌법이 비록 상징적 천황제를 주장 한다지만, 이전 헌법과 동일하게 천황에 관한 조항을 헌법 제1조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일본국헌법” 시대에 와서도 천황을 여전히 신권을 가진 종교적 권위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침략적 제국주의 시대 때에 가졌던 신정 정치적 국가체제를 가능한 유지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패전 후 천황은 헌법적으로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기능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행하는 일, 직무(국사, 공적, 사적으로 구분하지만)는 상당히 많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종교, 즉 제사적 직무이다. ‘대일본제국헌법’ 시대에는 천황의 종교적 직무가 ‘황실제사령’에 상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국헌법’으로 바뀌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이 적용되어 황실 제사에 관한 법률은 제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 것이 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일본제국헌법’ 시대에 실시되어 왔던 신권 천황의 황실제사령이 지금도 그대로 황실 제사에 적용 돼 실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천황에 관하여 논할 때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짚고 가지 않는다면 그저 공론으로 그칠 위험이 있다.
‘황실(궁중)제사’란 1888년에 만들어진 “큐츄산덴”(宮中三殿, 궁중삼전)에서 치러지는 ‘신지’(神事, 신을 제사하는 일, 또는 신의 일)를 말한다. 궁중삼전이란, 궁에 있는 세 개의 전을 말하는 것으로 ‘카시코도코로’(賢所)와, 이것의 서편에 있는 ‘코이레이덴’(皇霊殿), 그리고 동편에 있는 ‘신덴’(神殿)을 지칭한다. ‘카시코도코로’가 제사하는 신은 일본 신화에 나오는 황조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이다. ‘코이레이덴’은 역대 천황과 황족을 모시고, 그리고 ‘신덴’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이른바 ‘텐신치기’(天神地祇,즉 야오로즈의 신, 八百万의 神)를 제사한다. 궁중삼전에서 치러지는 제사는 천황이 직접 집행하는 대제(大祭)와, 쇼텐쵸(掌典長)가 집행하는 제사에 천황이 참가하여 예배하는 소제(小祭)로 나뉜다. 물론 궁중제사에는 이 외에도 많은 제사들이 있다.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가지 예를 들자면, 궁중에서는 매일 제사가 집행된다. 오전 8시에 ‘카시코도코로’와 ‘코이레이덴’에는 여성 당번이, 그리고 신덴에는 남성 당번이 ‘닛쿠’(日供)라 일컫는 공양을 바친다. 이러한 모든 제사 의식을 주제하는 것은 천황의 가장 큰 직무이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는 보통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매스컴도 모른다. 따라서 국민들은 들어본 적도, 본적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천황이 신들을 예배하고 제사한다는 것은 그가 ‘신깐’(神官, 즉 신관으로, 국가의 관리로서 신들을 섬기고 제사하는 시설에 종사하는 자를 말함)이 되었다는 뜻이며, 일본 국가교(신토)의 제사장으로 제사를 집행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천황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지금도 ‘신토’라는 국가 종교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비록 말은 ‘상징 천황’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침략전쟁의 사상적 기축을 이루었던 황실신토’(국가신토)가 여전히 일본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종교이데올로기로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의 모든 종교는 국가교(神道, 신토)가 관할

‘일본 국교’로서 황실 신토는 일본에 들어오는 모든 종교를 지배한다. 일본 불교 역시 신토의 지배 하에 있다. 예를 들면, 가장 공덕이 높은 스님에게 천황이 ‘다이시’(大師)라는 칭호를 하사한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일본 불교가 천황의 종교적 권위에 속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기독교 역시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일본 국가교, 즉 국체(国体)의 한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기독교신보”의 주필이었던 키토쿠 마사오미(亀徳正臣)씨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일본 기독교가 가지는 종교 개혁적 의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에서 국체는 영구 보편의 진리이다. 국민이 이것을 섬기는 심정은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일본 기독교는 이 국체 안에서 성립되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교단(일본기독교단)이 성립되었던 시기는 일본이 [대동아의 역사적] 대사명(大使命)을 자각하고 일어섰을 때였다는 사실은 교단이 일본 국체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서양의) 개인주의적 신앙에 대한 극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일원화되는 [일본만의] 독자적인 기독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세계 기독교계에 미치게 될 종교 개혁적 의의는 실로 중대하다. 이것은(교단) 어디까지나 존엄무비한 국체 안에서 태어난 ‘일본 기독교’라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독자적 기독교이다. 따라서 그것이 가지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동아시아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파하기에 충분하며, 미국과 영국의 거짓된 기독교가 가진 오류를 수정하는 것에 ‘일본기독교’가 가지는 종교 개혁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1945년, 일본이 패전하였을 때, “일본기독교단”은 교단의 ‘통리’(統理)토미타 미쯔루(富田滿)의 이름으로 전국 목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행동 지침의 통지문을 전달하였다.

본 교단의 목사 및 신도는 ‘텐노의 거룩한 뜻’(聖旨)을 받들어 모시어(奉戴) 국체를 호지(護持,황공해 하면서 수호하는 것)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일관하기를 바라며, 더욱 더 믿음을 증진하여 장래의 국력 재흥에 힘을 쏟아 텐노의 ‘거룩한 생각’(聖慮)에 부응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용어들, 즉 ‘聖旨’ 또는 ‘聖慮’ 등을 보라. 말하자면 교회가 믿음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사용되어야 할 용어들이다. 그런데 그런 용어들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텐노(천황)에 대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 국민전체가 그러하듯이, 모든 일본 교회도 텐노(천황)의 신격화에 매몰되어, 맹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교회는 천황제의 본질적 문제에 관하여 비판은 커녕 전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체호지의 일념으로 일관하여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기독교인의 본분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일본 연구가 챔블래인(B.H.Chmberlain)은 신토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의 국민 정신을 근대에 일본에서 새롭게 나타난 신흥 “종교”로 간주하였다. 또한 “에릭 페게린(Eric Voegelin, 1901-1985)은 국가를 하나의 몸, 한 가족으로 생각하는 “국체” 개념은 민족이나 국가를 “궁극적 실존”으로 신격화하는 “세계내적종교성”에 근거한 “정치종교”라고 간주하였다.
역으로, 국체론을 옹호하며 주장하였던 오카모토는 신토가 “일본국 고유의 종교”이며, 이것은 고대에는 소박한 자연신앙으로 이어져 왔지만, 고대 이후로 “국가교”가 되어 나라의 통일을 이루는 종교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왔다고 말한다. 이것의 근본 이념은 “황실중심의 국가주의”였다. 신토는 “일본국의 조상신교”(조상신들을 믿는 종교: 国家的祖先神教)로서 불교와 유교를 수용하면서, 더 나아가 근대에는 기독교까지 수용 모방하면서 융합된 범신론적 ‘국가교’라는 종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은 나라 전체가 천황을 현인신으로 섬기는 하나의 종교집단이며, 신토 예배공동체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일본인들이 가진 국가관이며, 종교관이다.

일본 국가교 : 황실신토의 기본적인 성격

종교성
천황과 황실은 일본 신화에 근거하여, 일본을 건국하고, 일본을 번영하게 하고, 일본인을 축복하는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와 역대 천황의 영들, 야오로즈의 신들을 예배하고 감사하며, 그런 것들에게 소원을 기도한다. 이러한 제사와 예배를 집행하는 중심에는 천황이 있다. 따라서 천황은 ‘신깐’, 즉 제사장이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다이죠우사이를 통하여 신격화되어,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와 신들, 천황의 영들이 지상에 펼쳐 내는 신적 존재이다. 그는 죽어서도 황조신이 되어 신의 영으로 제사를 받게 된다. 따라서 황실 신토는 특이한 일본 민족주의 종교이며, 일본적 다신교이고, 범신론을 통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결국 천황의 지배하에 모든 종교가 통폐합된다는 사상을 갖추고 있다.

정치성 : 양심과 종교 지배
이러한 황실신토는 역사적으로는 메이지 정부가 만들어낸 것으로, 일본국을 다스리기 위한 종교이데올로기이다. 메이지 정부가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 신토를 날조할 때, 고대 중세의 여러 서적과 전승에 근거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그것이 마치 고대로부터 흘러내려온 전통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메이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흥종교’이다. 왜냐하면, 대일본제국헌법 제1장 제1조의 “만세일계”의 천황 통치, 제2조의 “황실전범”(皇室典範),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등은 메이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는 “황실제사법”(皇室祭祀令)을 비롯한 여러 법률을 만들어, 천황교라는 종교이데올로기를 확립하였다. 그런 종교이데올로기를 모든 국민들에게 철저하게 주입시켜 모든 국민을 천황교 신자로 만들기 위하여 “교육칙령”(1890)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국가(종)교를 만든 메이지 정부의 목적은 1888년 4월 제국의회 추밀원에서 이토우 히로부미가 헌법 초안에 관하여 연설한 대목에서 잘 드러나 있다.

종교(기독교)는 유럽 제국의 기축을 이루고, 인심에 깊이 침투하여, (모든 국민 국가를) 통일시키는 것에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에는 종교로서 불교와 신도가 있다. 그러나 인심을 통일시키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약하여 기축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일본이 가져야할 유일한 (종교적)기축은 황실이다. (나는)헌법 초안을 작성함에 있어, 언제나 이것을 마음에 두었다. 왕권을 존중하여, 이것을 속박하는 것이 전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토우는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를 기축으로 각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 결속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하여는 일본 역시 국민을 하나로 묶어 정신적 사상적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축 종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종교가 천황을 제사장으로 하는 황실신토, 즉 천황교이며, 국가교이다.
황실신토의 제주(祭主)로서 천황은 종교적으로 신성성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은 종교적으로 신성한 특별한 나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특별히 선택 받은 선민이라는 식으로, 결국에는 정치 종교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성격이 확연히 강조되었다. 황실신토의 천황교가 가지는 종교적 원리는 “팔굉일우”(八紘一宇,천황을 중심으로 세계는 하나의 가족이다) 이다. “일본회의”(아베내각을 탄생시킨 우파조직단체)의 대표적인 인물 나카니시 테루마사(中西輝政, 쿄토대학교수)는 다음과 같이 천황을 표현한다.

일본은 언제나 ‘정직하며 깨끗한 마음’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심성’이라는 독특한 마음을 원한다. 더욱이 ‘순전하며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묵묵히 노력하며’ ‘약속을 지키는’ 등, 이러한 ‘마음의 청결함’에 큰 가치를 부여하여 왔다. … 이런 것이야말로 일본 문명이 가지는 특징이며, 이러한 ‘마음가짐’에 중요한 가치를 두는 문명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 이러한 ‘일본인의 마음가짐’을 가시적 형태로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황’이다” (『일본인으로 알아두고 싶은 것』 PHP연구소, 2008』.

이는 자기만족에 빠진 정치적 천황 찬가로, 천황의 종교적 교주 역할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모든 이념과 사상, 종교를 천황 아래에 두는 종교적 파시즘은 정교분리라는 헌법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사회성 : 자유와 인권 억압의 상징
평론가 오오야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려는 사상이 일본 황실이며, 그것으로 일본적 절대주의가 만들어 졌다. 그 피해자는 모든 일본국민일뿐만 아니라, 천황 그 자체가 가장 큰 피해자”이다. (大宅壮一, 『실천 천황기) , 2007.)
황실신토, 또는 천황교는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처럼 배타적인 일신교가 아니라, 넓은 마음을 가진 관용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실제로 일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신토 만큼 배타적인 종교도 없다. 국가신토체제(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황실신토체제)는 ‘불경건’ ‘치안유지법’ ‘종교단체법’ 등과 같은 족쇄로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국민들의 사상까지도 통제하였고, 반체제적인 종교나 사상을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신토는 국민의 사상, 종교, 양심의 자유까지도 강탈하는 종교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일본은 지금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유린하는 나라다.

일본과 그리스도교

근대국가로서 메이지 정부는 토쿠카와 막부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물론 서구열강의 압력에 의해서 메이지헌법은 “안녕과질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제국 헌법, 황실 예전, 교육 칙령 등이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천황은 신성하다”는 이념으로 천황절대주의국가를 수립하여 갔던 일본제국은 기독교에 치명적인 상처를 가져다 주었다. 다시 말해서, “천황이냐? 그리스도냐?”라는 정부의 억압과 국민들의 압박에 의해서 교회는 점점 복음의 진정성이 약해져 갔다. 갈수록 천황의 신격화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종교적 양심의 판단력이 흐려졌다. 일본 교회는 결국 “천황도 좋고, 그리스도도 좋다”는 아디아호라적 종교적 자유를 얻음으로써 “교회”만 보호할 수 있다면 ‘일본 국가교’도 섬기겠다는,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중시하는 신앙으로 변질되어 갔다. 결국 메이지의 기독교 역시 일본의 정황에 타협하여 갔고, 마침내 신토에 예속되어 그 본질을 잃어갔다.

그리스도교의 변질 : ‘일본기독교’의 성립

개신교의 일본 선교는 주로 메이지 정부에서 소외 당한 옛 ‘바쿠신’(幕臣.征夷大将軍를 주군으로 섬겼던 무사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도시의 인텔리층에서 일어났다. 독립심이 강했던 그들은 처음부터 “서구 vs 일본”, 또는 “선교사 vs 일본인 그리스도인”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교회생활을 영위 하였다. 계속되는 전쟁(청일/러일)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일본은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본제국주의적 정황은 일본 교회와 사람들을 민족주의로 내몰았고, 결국은 “일본(적) 기독교” 즉, 일본과 일본인에 의한 독자성이 과도하게 강조된 기독교, 환언하면 천황의 지배하에 그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기독교가 세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를 1872년 3월 10일에 세워진 “일본기독공회”의 신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공회는 일본인 신도를 중심으로 일본 최초로 세워진 개신교 교회이다. 이 공회는 1872년 4월에 자신들의 신앙 항목을 규정한 “공회정규”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회정규를 만들면서, “외부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소지가 있는” 항목들은 처음부터 삭제하여 버렸다. 삭제된 내용은 최초의 수세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안도 류타로라고 하는 메이지 정부 첩자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다.

제1조 황조 토신 앞에서는 절하지 말 것.
第一条曰皇祖土神ノ廟前ニ拝跪スへカラサル事
제2조 왕명이라 할지라도, 기독교(도)를 위하여 굴종하지 말 것.
第二条曰王命ト雖モ、道ノ為ニハ屈従スへカラザル事。
제3조 부모 혈육의 은혜에 애착하지 말 것.
第三条曰父母血肉ノ恩ニ愛着スへカサル事。

이처럼 일본 기독교는 첫 단추부터 국가에 타협하는 천황제에 충실한 기독교를 만들어 갔다. 삭제된 이 내용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내용이었고, 이 사건을 통해 일본 기독교의 변절이 여실히 드러남을 보게 된다. 변절된 신앙은 변절된 신학을 잉태한다. 그들의 변절된 신학은 구약을 경시하고 십계명의 우상에 대한 가르침, 선지자들의 가르침, 왕국의 멸망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기독교회’는 구약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 교회의 구약은 다름 아닌 “고지키”(古事記)라고 선전하는 목사들까지도 나타났다. 구약이 인용되는 경우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을 천황의 황국 백성의 전쟁으로 바꿔 놓을 때 뿐이었다.
그들의 변절된 신학은 성경 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이 처음부터 중요하게 지켜왔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다. 교리와 신앙고백은 교조적이며, 무미건조하고, 번쇄한 것으로서 일본인들에게는 맞지 않다고 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성경의 체계적이고 교리적인 가르침을 통하기보다 인격, 신념, 의지, 심정 등을 강조하면서 윤리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러한 흐름은 태평양 전쟁 전부터 일본 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천황을 경애하였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우찌무라가 두개의 J를 말할 때는 그에게는 언제나 Japan이 Jesus보다 먼저, 또는 그 위에 올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본(적) 기독교’를 제창한 동지사 대학의 신학자 우오키 츄이치(魚木忠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 정신을 기반으로 전개되어진 기독교야말로 일본 정신의 자각적 발전과 함께 스스로의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것이 (세상에서 유일한) 일본 기독교이다. 신앙인에게 일본 정신과 기독교는 둘이 아니라, 혼연히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일본 기독교의 의식이다.

사실, ‘일본(적)기독교’라는 이질적이며 변절적인 기독교를 총결산하는 작품은 “대동아공영권에 있는 기독신도들에게 보내는 서한”(1944)이다. 이것은 사도적 서한이라는 형태로 대동아공영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아주 교묘하게 절대적 신권 천황제를 찬양하고, ‘일본(적)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신권적 천황을 중심으로 일으킨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침략당한 국민들을 공갈 협박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일본의 국체(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존재 형태)를 근거로 수정된 ‘일본기독교’야 말로 본래의 기독교이며, 그것이 역사 가운데 구현된 것이 바로 “일본기독교단”이라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일본기독교’를 중심으로 대동아의 모든 국가들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전한 일본기독교

그런데 3.1절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에도 “대동아공영권에 있는 기독신도들에게 보내는 서한”이 담고 있는 일본적 기독교 사상이 일본의 교회 근저를 여전히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례로, “서한”의 현상공모논문 심사위원이었고, 패전 후에도 여전히 일본을 대표하였던 신학자 쿠마노 요시타카(熊野義孝)는 자신의 전쟁시의 어용적 행적에 관하여 아무런 말도 없다. 같은 심사위원이었던 히야네 안테이(比屋根安定), 유키 코(由木康), 그리고 입선하였던 마쯔무라(松村克己) 야마모토(山本和) 역시 패전 후, 자신들의 만행에 관하여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천황제 어용 신학자들의 반성과 회개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저 덮고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들의 뒤를 이은 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오키히데오(大木英夫), 콘도우 카츠히코(近藤勝彦) 등도 이 문제에 관하여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한다.
실로 일본의 기독교와 교회들은 메이지로부터 형성되어 왔던 독자적인 ‘일본기독교’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천황의 신성에 관하여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분명하게 지적하는 그리스도인 또한 많지 않다. 오히려 변형된 일본기독교가 점점 우세하여 간다. ‘일본적 기독교’를 주장하면서 일본 민족을 선교하고 전도하려는 ‘일본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그 전형적인 예다.

“일본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겸허한 자세로 과거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배우기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저술이나 논문들, 또는 학자들을 “일본과 일본인을 헐뜯는 좌파”들로 규정하고, 단순히 일본과 일본인을 보다 사랑하자는 사람들로 구성된 크리스천 모임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일본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 이름하였다. 그들이 2014년에 크리스천 신문에 내건 광고 슬로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학사관(전쟁을 일으키고 침략국이라는)을 넘어서 우리 나라, 일본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흥을 바라보며 기도하자!” 였다.
이 모임은 일본 교회는 좌파 이데올로기와 전후 GHQ(연합국군총사령부)들이 일본인에게 죄악과 죄책감을 심어 세뇌 정책을 실시한 결과로 일본 교회는 일본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전도가 안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전쟁을 일으킨 나쁜 국가라는 자학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그들에 의하면, 오히려 하나님은 일본에게 “구속의 은사”(주되신 하나님이 각각의 민족이나 문화 가운데 참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열쇠를 준비해 주셨다는)로 신토와 천황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에, 세뇌 정책에 의한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참된 일본인으로서 일본 문화를 사랑하며, 황실을 경애하고, 대동아전쟁의 정당성, 국가/국기의 존중 등을 내세우는 선교에 힘을 쏟는다면, 그리스도인 인구가 1%밖에 되지 않는 선교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선교 열정은 대단하다. 선교를 위해서는 일본 사회와 문화에 적합한 상황화, 또는 문맥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 중심의 교회관보다도 그 나라에 적합한 선교론을 주장한다. 그들의 설립 취지에 의하면, “일본인이 본래 가진 아름답고 고상하고 진취적인 기운을 그리스도 복음에 의해서 재건하자”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에 일본인들이 상당수 동조하고 있다. 천황교의 종교이데올로기에 의한 침략전쟁과 천황의 신격화는 일본인들에게 일말의 양심의 꺼림도 없이 지금도 수용되고 있다. 100년 전, 3.1독립운동이 항거하며 투쟁했던 일본의 종교이데올로기가,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의 현실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결어

패전으로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그 때 일본정부는 ‘국체’만큼은 호지(護持)할 수 있도록 끝까지 연합국에 요구하였다. 결국 연합국은 전후 처리의 정책적 배려라는 측면에서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체 호지 문제는 일본국민의 뜻에 맡기는 것으로 승인하였다. 이 승인은 결국 정치적으로 천황을 현인신으로 섬기는, 국가 신토교의 영속을 가져왔다. 따라서 천황제, 천황교라는 종교이데올로기 감옥에 갇혀 있는 이상, 일본인은 일본 만을 생각하는 국수주의자가 될 것이며, 인류의 보편적 인권이나 정의에 대하여는 냉담한 국민으로 남을 뿐이다.
“상징 천황”이라는 글귀로 국민들과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여전히 천황제 파시즘 종교이데올로기 지배구조는 전통과 관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천황의 신격화와 종교화는, 인류가 가진 기본적인 양심과 종교의 자유라는 보편적 권리를 유린하는 것이다.
3.1독립운동은 실로 일본제국주의의 천황제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적 종교이데올로기로서의 천황제가 아직도 건재하며, 일본 국민들의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여전히 박탈하고 있다. 이 천황교의 종교성은 너무 강하여 많은 종교인들, 지식인들 조차도 그것에 포로 되어있다. 그 좋은 예로, 일본 개신교 교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일본기독교단’(UCC)은 ‘야수쿠니 천황제문제센터’를 이미 17년전에 폐지하였다(2002.10).
3.1독립운동 백 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란, 우리 민족이 투쟁했던 천황제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아직도 투쟁하고 있는 일본의 소수자에게 3.1운동의 정신을 전달하여 현재의 역사 속에서 구현하고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3.1 정신은 그들에게 큰 배움과 희망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 주님에 의한 화해와 평화와 위로가 영위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오노시즈오, 일본기독교회사 (김산덕역)
吉馴明子・伊藤彌彦・石井摩耶子編 『現人神から大衆天皇制へ』(刀水書房)
松谷好明 『キリスト者への問い』(一麦出版社)
岩崎孝志・金山徳外編 『主の民か、国の民か』(いのちのことば社)
土肥昭夫 『天皇とキリスト』(新教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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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천황제(삼일운동100주년기념기독교학술제 발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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